기원전 334년에서 330년 사이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 3세와 다리우스 3세의 대립은 헬레니즘 제국의 승리로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를 정복하여 페르시아의 폭정을 종식하고 이집트인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가 이집트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번영을 이어갔습니다.
그 이후,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우면서 이집트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집트는 그리스 문화와 토착 문화, 기독교가 함께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를 품고 번영했습니다.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되었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에는 파로스의 등대와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과 도서관이 건립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대에는 거대한 함선인 포티도 건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무력을 통해 이집트를 지배하는 외부 왕조였으며,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로마, 아랍, 튀르크 정복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이런 역사적 과정은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속주인 이집트는 ‘아이깁투스(Aegyptus)’라 불렸으며, 로마 제국에 편입된 후에도 중요한 지역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중요성은 밀 생산과 상업 활동을 통해 로마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역사는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의 영향을 받아 번영하며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으며, 이집트의 중요성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이집트는 풍부한 역사를 겪으며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이집트는 그리스 문화와 토착 문화, 그리고 기독교와 같은 다양한 문화가 결합하여 독특하고 다채로운 문화를 유지해 왔습니다. 기독교 국교화 이후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있었지만, 이집트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번영시켰습니다. 이집트는 항상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성 마르코와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은 이집트에서 기독교의 뿌리를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기원 65년에 성 마르코가 이집트에 도착하고 선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의 노력은 이후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성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를 설립하여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지역 중 하나였지만, 이에 따라 분리주의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이집트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공로를 남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독자적인 신학 노선을 밀고 나가 합성론이라는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이 신학은 지금까지도 콥트 교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부유함과 영향력 덕분에 항상 로마 제국의 중앙 정부와 대립하는 파벌의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지만, 이슬람의 흥기 동안 무력한 저항 없이 손쉽게 이슬람 군사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저항은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파라오 제도가 수천 년 동안 유지되다가 기독교의 확산으로 퇴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제국 황제들은 이집트를 포함한 동방 지역에 기독교가 확산됨에 따라 파라오 제도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파라오 칭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수여된 것으로 기록되며, 이로써 이집트의 파라오 개념은 퇴조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