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삼티크 2세는 네카우 2세의 후계자로 6년간 재위했습니다. 그 짧은 재위 기간에도 중요한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특히, 쿠시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파타로 원정을 떠나 쿠시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파타를 함락시키고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데에 성공하여 쿠시 왕국의 세력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누비아를 정복한 후, 그는 이집트로 돌아왔고, 누비아와 이집트 사이의 국경은 나일강의 제1폭포 부근으로 고정되었습니다.
프삼티크 2세는 정복 활동 외에도 많은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 진정한 문화 활동으로 제26왕조 시대의 대부분 신전을 건설한 주역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그는 헬리오폴리스에 높이 21.79m에 이르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필레 섬에 필레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프삼티크 2세 시대에 건립된 건물 중 현대에도 보존된 것들이 많아 고대 건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와히브레가 제4대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와히브레는 예루살렘의 신바빌로니아 군대에 대항할 수 없었고, 누비아에 그리스계 도리아인들의 침입을 막지 못했습니다. 군대 내에서 항명이 일어나고 내분이 생겼으며, 결국 군사령관 아흐모세 2세가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히브레의 재위는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통치 시기는 이집트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와히브레의 통치는 군사적인 패배와 내부 분쟁으로 인해 악화하였습니다. 이미 그 당시 이집트 군대 내부에서는 파라오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풍부했으며, 외국계 용병들과 이집트 군인들 간의 갈등으로 분란이 빚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란이 일어나 아흐모세 2세가 스스로를 파라오로 선포하고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반면 와히브레는 왕권을 되찾기 위해 신바빌로니아의 지원을 받고 도망쳤지만, 전투 중에 전사했습니다.
아흐모세 2세는 와히브레를 꺾으며 자신의 지반을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성과는 동시에 페르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는 아흐모세 2세에게 유능한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아흐모세 2세는 의사 한 명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의사는 가족을 이집트에 두고 홀로 페르시아로 보내진 것에 대한 앙심을 품었습니다. 아흐모세 2세의 딸을 왕비로 맞으라고 캄비세스 2세에게 권유하면서 친밀도를 높였습니다. 이에 캄비세스 2세는 결혼을 제안하였고, 아흐모세 2세는 자기 딸을 보내기보다 와히브레의 딸을 위장시켜 보냈습니다. 그러나 와히브레의 딸이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자 캄비세스 2세는 분노하며 이집트를 침공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흐모세 2세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지도자였으며, 그의 재위 동안 이집트 왕국은 지중해 지역과 그리스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그는 그리스의 다양한 폴리스들과 교류를 촉진하였으며, 대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지중해 지역에 식민 교류지를 설치하고 무역을 진행함으로써 이집트의 부를 급속하게 증가시켰습니다. 그리스에서 방문한 이집트에 머무른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번창한 상황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번영과는 대조적으로 중동 지역에서는 격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신바빌로니아는 오랫동안 중동의 패권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대대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키루스 2세는 뛰어난 군사력을 발휘하여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 같은 중동의 경쟁 상대들을 제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는 다음 타겟으로 이집트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아흐모세 2세의 말기에는 페르시아의 위협이 커져가는 상황이었으며, 이집트가 누렸던 평화와 부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앞두고 폭풍전야의 고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