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기원전 1077년부터 기원전 664년까지의 시대로 나누면 제21왕조부터 제25왕조까지가 제3중간기에 해당합니다.
제21왕조 시대의 이집트는 인근 강대국인 아시리아의 성장과 함께 계속해서 약화되었습니다. 제21왕조의 뒤를 이어 리비아 출신의 제22왕조가 왕위에 오르지만, 옛 성세를 회복하는 것은 어려웠고, 결국 기원전 837년에 하이집트와 상이집트로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제22왕조는 북부 하이집트를 통치하고, 제23왕조는 남부 상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왕조 모두 통제력을 잃어버리면서 이집트는 리비아-이집트계 소왕국들과 도시들 사이에서 군웅하는 난세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한 것은 쿠시 왕국의 누비아인들이 세운 흑인 왕조, 즉 제25왕조였습니다. 쿠시 왕국의 왕 피이(피앙키)는 상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3왕조와 제24왕조의 세력을 흡수하였으며, 테베를 장악한 후 하이집트 일대와 제22왕조까지도 멸망시켰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25왕조는 옛 신왕국 시절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전쟁 중 파괴된 카르나크 신전을 재건하고, 나일강을 따라 수많은 신전과 건물을 건설하여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제25왕조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신아시리아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이집트는 남쪽으로 쫒겨났습니다. 파라오 타하르카는 일시적으로 멤피스를 회복했지만, 아시리아 군대에 패퇴하여 이집트를 잃어버렸고,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에 이집트 말기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람세스 11세가 30년의 재위를 끝마치고 사망하자 죽은 파라오의 장례를 집전한 스멘데스 1세가 왕위에 올라 제21왕조(혹은 타니스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스멘데스 1세를 포함해 제21왕조의 역사는 내내 파라오의 왕권 약화와 지방의 할거, 그리고 외세의 침략 등 부정적인 것들로만 가득했다. 한때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집트 신왕국은 대왕 람세스 2세 사후 차차 쇠락하더니 결국 제20왕조에 들어서는 약소한 왕권과 국력의 저하로 신음하던 상황이었다. 파라오의 권위가 약해짐과 동시에 남부 상이집트의 테베를 중심으로 한 아문의 대신관들의 권력은 날로 강해졌고, 신왕국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 시대에는 거의 한 나라 안에 두 정부가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문 신관들의 힘이 강력해졌다. 스멘데스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기는 했으나 그의 영향력은 오직 북쪽 하이집트 일대에만 머물렀고, 이집트 중부와 나일강 상류 쪽 상이집트는 테베의 아문 신관들이 차지한 채 명목상으로만 파라오를 받들었다. 스멘데스 1세는 무려 26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분열된 이집트를 통치했고, 결국 테베의 신관과 상이집트를 다시 파라오의 권위에 되돌려놓지 못한 채 기원전 1051년경에 사망했다.
스멘데스 1세가 죽자 아메넴니수가 잠깐 재위했다가 바로 프수센네스 1세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프수센네스 1세는 46년을 통치했으나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그의 재위기에 타니스 주변에 거대한 성벽을 둘러 요새화시키면서 이집트의 수도가 완전히 멤피스에서 타니스로 옮겨졌다. 프수센네스 1세가 상대적으로 테베의 아문 대신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프수센네스 1세 사후 즉위한 아메네모페 역시 형식상으로나마 테베의 신관들로부터 전 이집트의 군주로 인정받았다. 아메네모페 이후에도 대 오소르콘, 시아멘, 프수센네스 2세 등이 연달아 파라오가 되었으나 이들에게 특기할 만한 업적이나 공로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시아멘은 이스라엘 왕국의 현왕 솔로몬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낸 파라오라고 추정되고 있어 제21왕조의 다른 파라오들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아주 약간 있는 편이다.
셰숑크 1세의 증조부인 파이후티는 리비아의 대족장으로서 이집트군의 대장이었으며, 셰숑크 1세의 삼촌은 대 오소르콘, 또한 셰숑크 1세는 프수센네스 2세의 딸의 양아버지였습니다. 이로써 셰숑크 1세는 이집트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을 강화한 리비아 출신의 파라오였습니다. 제21왕조의 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가 사망하면서 리비아 동부 메시웨시족 부족장 출신인 셰숑크 1세가 왕위에 올라 제22왕조(또는 부바스티스 왕조)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셰숑크 1세는 이집트 군대의 군사령관과 수석 고문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로, 그의 조상들은 고대 리비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고대 이집트에 정착한 리비아인들이었습니다.
프수센네스 2세가 사망하자, 셰숑크 1세가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집트를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고, 프수센네스 2세 시대의 ‘아문의 대신관’ 자리를 계승하여 테베의 신관들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셰숑크 1세는 대외적으로는 공격적인 전략을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가나안 지역을 공격하며 다윗과 솔로몬의 재물을 약탈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한 혈연적 결합을 통해 아문 신관의 딸들과 여러 번 결혼하며 신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셰숑크 1세의 재위는 21년간 이어졌으며, 이후에는 오소르콘 1세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오소르콘 1세는 이집트를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시기를 이끌었으며 여러 신전을 재건하고 세드 축제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시대에는 큰 재앙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아 오소르콘 1세를 제22왕조의 전성기로 본 고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후에는 셰숑크 2세가 즉위하였으나 그의 출신은 불분명하며, 그의 다음 파라오로는 타켈로트 1세와 그의 아들 오소르콘 2세가 나란히 즉위하였습니다.
오소르콘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사촌인 하르시에세 A가 테베와 서부 오아시스를 통치하던 동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오소르콘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지만, 다행히도 하르시에세 A는 기원전 860년에 사망하였고, 그를 대체할 강력한 반란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오소르콘 2세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소르콘 2세는 테베와 남부 상이집트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기 아들 님로트 C를 아문의 대사제로 임명하여 테베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거대한 위협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히타이트 이후 등장한 아시리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서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집트의 전통적인 영향권으로 알려진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역까지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집트는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 공격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쇠퇴가 시작된 이집트가 아시리아와 싸우기엔 어려운 일이었으며, 결국 이집트는 조금씩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오소르콘 2세를 계승한 셰숑크 3세는 테베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셰숑크 3세에게 도전했습니다. 원래 셰숑크 3세는 오소르콘 2세의 손자였지만, 그의 사촌이자 아문의 대사제인 타켈로트 2세는 셰숑크 3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오소르콘 2세가 기원전 837년에 사망하면서 이집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열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전에 오소르콘 2세에 반란을 일으켰던 하르시에세 A를 제23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로, 타켈로트 2세를 제2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간주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같은 왕조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제22왕조와 제23왕조는 사실상 같은 왕조였습니다.
타켈로트 2세는 남부 상이집트와 중부를 지배하였으며, 이로 인해 셰숑크 3세가 지배하던 제22왕조는 나일강 하류의 이집트 북부 지역만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타켈로트 2세가 장악한 남부 상이집트에서도 계속 전쟁이 진행되었으며, 타켈로트 2세가 파라오로 즉위한 지 11년째에 페디바스테트가 테베에서 반란을 일으켜 테베를 점령하고 자신을 파라오로 선포했습니다. 격노한 타켈로트 2세는 아들 오소르콘 3세를 파견하여 테베를 재정복했지만, 4년 후 다시 반란이 일어나 타켈로트 2세의 군대를 쫓아내면서 상이집트 내에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결국 오소르콘 3세가 승리하여 27년 동안의 분열을 종식시켜 상이집트를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이 시대에 이집트는 북부 하이집트에서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가, 남부 상이집트 일대에서 오소르콘 3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이집트는 점차 쇠퇴하며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의 통치 동안 수많은 부족과 도시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제22왕조의 영향력이 계속해서 줄어들었습니다. 상징적인 도시인 멤피스마저 리비아 출신의 추장들의 영향 아래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결국 영토 대부분을 잃어버린 제22왕조는 수도 타니스와 인근의 부바스티스 인근만을 겨우 다스리는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했다. 셰숑크 5세가 기원전 730년에 사망하자 제2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오소르콘 4세가 즉위했다. 오소르콘 4세가 즉위할 시점 이미 하이집트 지방은 리비아 출신 귀족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군벌 세력과 소왕국들로 쪼개져 버렸다. 오소르콘 4세가 통치하던 영역은 나일강 삼각주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만 부분이었는데, 그는 쿠시 왕국의 왕 피이와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을 동시에 받으면서 최악의 위기에 놓였다.
그나마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던 제22왕조가 하이집트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리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와중, 제22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분계 왕조였던 제23왕조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페디바스테트를 꺾고 남부 상이집트를 통일한 오소르콘 3세가 기원전 769년에 사망하자 타켈로트 3세, 루다멘이 연달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파라오 루다멘이 죽은 이후 제23왕조는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제23왕조의 수도인 테베에서는 이니가 루다멘의 후임으로 즉위했으나, 4~5년 남짓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제23왕조는 결국 기원전 728년에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이 시기 즈음, 상이집트 지방에서 리비아 출신 군벌 테프나크트가 등장, 나일강 삼각주 서부 사이스를 중심으로 단명한 제24왕조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