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역사에서 제3중간기는 이집트의 번영과 혼란이 교차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짧은 역사 동안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중동의 강대국인 신아시리아 제국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제25왕조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왕은 이집트를 직접적으로 통치하기보다는 부유한 이집트 도시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의 지배자로 프삼티크 1세를 내세웠고, 이것이 제26왕조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제26왕조는 사이스를 수도로 삼아 “사이스 왕조” 또는 “상인 왕조”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 전역을 다스렸으며, 처음 몇 년 동안은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이집트 전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며 위기에 처했습니다. 프삼티크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리디아 왕 김게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기게스는 요청을 거절하여 아시리아와 프삼티크 1세의 관계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프삼티크 1세는 결국 기게스의 도움을 받아 반란 세력들을 평정하고 이집트를 재확보했습니다. 그에 보답으로 그는 리디아 상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나일강 삼각주와 누비아 지역의 무역 및 통행 권리를 보장하여 기게스와의 동맹을 유지했습니다. 프삼티크 1세는 리비아의 유목민과의 전쟁을 벌이고 요새를 건설하여 이집트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는 제3중간기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였습니다.
프삼티크 1세의 통치 후기에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왕이 별세하면서 아시리아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스키타이인들이 레반트와 중동 지역에서 활개를 치며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다시 반란의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러운 아시리아의 신하였던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에 충실하며 신의를 섬기며 원군을 파병하는 등의 노력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아시리아의 충복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쇠락하자 이집트 바로 코앞까지 온 스키타이인들에게는 화평을 제안하고 이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등 유연한 외교 정책도 펼쳤습니다. 이러한 외교 노력은 중동의 혼란을 완화하고 이집트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프삼티크 1세의 기원전 610년 사망 후, 네카우 2세가 제26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즉위했습니다. 그 시절 중동의 정세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아시리아가 몰락하면서 지역에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다양한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킴메르인, 스키타이인, 신바빌로니아 등이 권력을 쟁취하며 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잔여 세력은 하란을 수도로 삼고 저항했지만, 이미 아시리아는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이었습니다. 네카우 2세는 즉위하자마자 아시리아에 원군을 보냈지만, 반란군에게 패배하며 아시리아의 실패를 겪었습니다. 하란까지 잃은 아시리아는 멸망의 길로 향하게 되었고, 네카우 2세는 이집트로 회군했습니다. 하란 공성전에서의 실패 후에는 아슈르-우발리트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 아시리아의 운명은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네카우 2세는 이집트로 회군 중인 도중 요시야 왕의 사망과 여호아하즈의 즉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아하즈를 쫒아내고 여호야김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네카우 2세는 폐위된 여호아하즈를 이집트로 데려왔고, 이집트에서 여호아하즈가 세상을 떠난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점에서도 이집트군의 일부가 시리아에 남아 있었는데,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폴라사르가 쿠무크 지방을 점령하여 이집트 군대의 회군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이에 네카우 2세는 결국 4개월에 걸친 쿠무크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쿠무크는 다시 이집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나보폴라사르는 다시 군대를 모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바빌론으로 후퇴했습니다. 기원전 606년, 이집트는 신바빌로니아를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줬습니다.
승전보를 얻고 네카우 2세는 옛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나보폴라사르를 대신해 이집트 군대를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장악하면서 네카우 2세의 꿈은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네카우 2세는 영토 회복의 실패를 겪었으며, 이후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거대한 운하를 건설하거나 페니키아로 함대를 파견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했지만 이집트 통치는 만족하다가 기원전 595년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삶은 이집트 역사의 한 장을 이야기합니다.